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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읽기 by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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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들어가며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C.S 루이스순전한 기독교를 수년 전에 처음 접하며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의 영역, 혹은 이해보단 믿음이나 받아들임의 영역에 머물던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뒤엎는 놀라운 경험이었지요.

저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답답함이 존재했습니다. 그 답답함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1. 내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Christianity, 기독교란 무엇인가)
  2. 그런 하나님을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3. 나는 누구인가

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을 생각해냈을 때 저는 제가 몸담았던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르고, 잘 모르는 그 분을 전혀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그런 질문조차 없었습니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 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 중 순전한 기독교는 한국기독교에 의해 일반적으로 개념화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공했습니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믿기지도 않는 신화와 같은 구절들을 억지로 믿기 위해 암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플라톤적 서양 철학의 기조에 절여진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을 이분법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경향을 띕니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문과는 감성적이고 이과는 이성적이다” 등의 언법은 물론 농담조로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 저변에 있는 우리의 인식을 어느 정도 반영합니다.

제가 경험한 한국 교회에서 비춰지는 하나님과 기독교 사상은 상당히 감정적이었습니다. 열심히 열망하고 간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복적 분위기가 만연했으며, 그리스도인이라 참칭하는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예수님에게 맡기고 의지하기에 바빴습니다. (여기서 ‘참칭’을 사용한 이유는 최소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모습에 감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 우리가 드리는 시간(정기적인 예배와 행사)과 헌금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마가복음 4:20, 마태복음 13:8 어떤 요소가 확실히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임재한 근본적인 목적은 불쌍한 인생을 구원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제자삼아 세계에 파송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파송의 사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요.

그동안 교회를 다니며 저는 성경이 의미하는 본래적 의미를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의문을 충분히 품어보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교회에서 가르치고 보여주는 대부분의 것들이 성경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합리적 해석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성도들을 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성도들이 듣기 원하는 소리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스도인은 이성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될까요? 감성적으로 신앙생활하는 것만이 옳은 방식일까요?

성경에 대한 이성적 해석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에 의해 구축된 왜곡된 교리(관습)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10 세기가 넘게 지속된 중세의 교회에서 끔찍한 마녀사냥이 자행된 이유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깨어 있고 성경을 올바로 읽을 줄 알며 비판적인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마녀 혹은 이단자로 낙인찍혀 가차 없이 살해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애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잔인한 처벌이 신성에 대한 강한 믿음 아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감정적으로 동요된 신앙심이란 마구 휘두르는 날카롭고 거대한 칼날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형태는 다르지만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적인 신앙의 기조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물신화된 예배, 기복신앙, 동성애자 혹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악마화 등으로 나타납니다. 여러 금기를 내재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것들을 건드릴 때 뭔지 모를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성적인 해석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쉽게 흔들리며 몇몇 오해를 가지고 있는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차분한 고민은 필요한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C.S 루이스의 이 책은 이와 같은 새로운 접근법(논리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의 기독교 이해)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을 창조한 그분으로부터 옳은 것을 옳게 보고 그른 것을 그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으므로, 그 도구를 활용하여 그분의 여러 모습들을 조망하고 그동안 품었던 의구심과 불편함에 대해 성역 없이 고찰해보는 것은 매우 색다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플라톤적 이분법의 기조를 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그분을 이성적이라거나 감성적이라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추상적 개념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성적으로 그분을 깊이 생각해보거나 감정적으로 간절히 열망해보거나 할 수밖에 없겠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총체 자체가 그분 한 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순전한 기독교 읽기

이 글의 목적은 새로운 접근법으로 우리가 알던 기독교를 다시 읽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접근법이란 보다 논리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이성적 사고능력 또한 그 근원은 그분에게 있습니다.) 기독교의 공통적이고 참된 원리를 이해해보는 것입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1952년에 출판되었지만, 이것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거나 거의 잊어버린 기독교인들에게는 생소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는 그분 자체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지만베드로전서 4:8,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린도전서 13:1와 같습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순종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분의 은혜 없이는 도무지 사랑도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자신이 사랑 자체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실제적으로 와닿습니까? 아니면 머리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단순히 사실이 그러하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교조 속에 살아 오셨습니까? 바로 이 지점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는 이 책을 각 목차와 세부 챕터별로 요약하는 한편 제 생각이나 해석을 함께 기록할 것입니다. 이미 이 책을 읽었다는 전제 하에 진행할 것이므로, 제가 경험해왔던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에 대입해보기 위해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중심을 더 둘 생각입니다.

만약 한 번도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말

이 책의 이야기 방식은 딱딱한 논문이나 철학서적과는 사뭇 다릅니다. 철학서처럼 사고의 논리적 단계를 거쳐 내용이 전개되기는 하나, 그것이 불필요하게 사변적이지 않고 거창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문체가 강사가 대중 앞에서 강연을 하듯이 구어체에 가깝습니다. 독자층이 기독교도들뿐만 아니라 비非기독교인들까지인 이유도 있겠지만 1941-1944 동안 이루어진 BBC 라디오 강연 원고를 토대로 지어진 원인도 있습니다.

이 책의 지향점

이 책의 지향점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자체를 조망하는 데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루이스는 기독교의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로마 카톨릭 등 여러 교파뿐 아니라 기독교 바운더리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여 오해나 논쟁의 여지를 최대한 피하고자 주제를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로 한정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놓은 문제들은 고도로 신학적인 논점이나 교회사적인 논점들과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음
    • ex) 성모 마리아 논쟁
  2. 이러한 논쟁거리들을 놓고 토론하는 일은 불신자를 그리스도인의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점
  3. 이미 이러한 논쟁적 문제에 뛰어 든 작가들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순전한’ 기독교 자체를 옹호하는 작가는 적었음

몇몇 문제들에 대해 침묵한 이유

성모 마리아 문제와 같이 지향점에 맞지 않는 논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루이스 자신의 견해는 있지만) 침묵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와는 다른 이유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몇몇 문제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문제란 루이스 자신이 직접 당하고 있지 않은 유혹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컨대 루이스는 기질상 도박의 충동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도박의 허용 여부에 대해 충고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은 여자도 아니고, 결혼한 남자도 아니며, 목회자도 아니기 때문에(그런 입장을 취할 의무가 있는 목회자의 직무를 맡고 있지 않음) 산아 제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Christian) 용어 논쟁

루이스의 ‘그리스도인’ 정의는 ‘기독교의 공통되는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는 실제로 정말 많은 합리적인 반대에 직면할만 한 정의입니다. 일반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에 훨씬 더 가깝게 사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이는 지극히 옳고 관대하며 정신적이고 민감한 견해입니다.

하지만 유용성의 측면에서 공통된 논리를 진행함에 있어 이것은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사’(gentleman)란 용어는 ‘문장을 수놓은 외투를 입고 다니며 상당한 땅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단순 사실을 진술하는 정의와 ‘명예롭고 정중하며 용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의 중 후자의 것에 더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적이고 정교한 새 의미는 어떤 사람을 ‘신사’라고 부름에 있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단지 그를 칭찬하는 방식이 되도록 합니다.

어떤 단어가 묘사의 역할을 잃고 단순한 칭찬의 말이 되어 버릴 경우, 그 단어는 더 이상 화자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사실들을 전달하지 못하고, ‘근사한 식사’란 ‘화자가 좋아하는 식사’를 의미하는 것처럼 그저 화자의 태도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게 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상적이며 정교한 의미가 진정한 의미에서 더 옳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책의 지향점을 생각한다면(순전한 기독교의 공통된 요소를 논리적으로 조망하는 것)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결국 무용한 단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므로, 과연 어떤 사람이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에 가까운가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루이스의 ‘그리스도인’ 정의를 토대로 보다 분명한 어법은,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보다는 “그는 나쁜 그리스도인이다”입니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루이스가 말하는 ‘순전한’ 기독교란 여러 방으로 통하는 문들이 있는 큰 집의 현관 마루에 가깝습니다.

기독교의 각 종파는 결국 여러 방 중의 하나이고 순전한 기독교를 고찰하는 것은 현관 마루에서 어느 방을 선택해 들어가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규칙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관 마루에서 우리는 아예 야영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할 지 알기 위해 빛을 비추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기다리는 기간은 다를 수 있곘으나, 그분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보시는 만큼 기다리게될 것입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갈 지 선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취향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의 예배 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 보다는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길 꺼리는 것은 나의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 때문이거나 특정 문지기를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가 올바른 물음입니다.

해석

저는 특히 ‘그리스도인’ 용어 논쟁과 관련해서 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겉모습과 형식보다는 그 마음 중심에 사랑을 품고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생각 저변에는 너무나도 형식화되고 겉치레에 치우친 것으로 보이는 한국 교회에서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렇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말은 곧 “그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화자의 취향만 반영된 무용한 용례가 될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스스로는 개념적으로 어떤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할지 모르겠으나,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 혹은 그러한 말을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을 이해하고 그것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한참 부족해보일지라도) 보다 분명하고 공통적이며 실제적인 의미로써 이 단어를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루이스의 논리의 지향점에 비추었을 때로 한정됩니다. 본질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언제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에 이 단어의 무용한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그 정의를 한정하는 한편, 이것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내면에서부터 참된 의미를 생각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설명과 나눔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또한 순전한 기독교란 큰 집의 현관 마루와 같다는 루이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가 어떤 방(감리교) 안에 어릴 적부터 있었지만, ‘순전한’ 기독교에 대한 개념은 없었기 때문에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이유에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어떤 방 안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성경을 되짚어가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는 반복되는 죄/회개의 싸이클, 내면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존재적 자괴감,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낡은 설교 등으로 인해 깊은 늪에 빠져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었습니다.

늪에 빠지는 사람이 바라는 한 가지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연결 고리를 끊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 그동안 억눌렸던 존재적인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내면 깊숙히 자리한 죄의식이라는 큰 뱀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다시 현관 마루로 회귀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무시해도 좋을 만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저는 이런 저런 사상과 이론들에 대해 아주 얕게나마 살펴보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는 진리는 그 의미대로 오직 하나이며 표면적으로 발현되는 수많은 종교와 토속신앙, 이데올로기, 과학주의는 좋은 방향이든 아니든 간에 이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개신교에서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은 정말 궁극의 절대자의 모든 면을 담고 있을까요? 혹시 저 아프리카의 자그마한 샤머니즘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여호화의 어떤 면을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기독교인들이 (테러와 극단주의로 인해) 적대시하는 이슬람교의 뿌리는 결국 여호와로부터 출발했다는 불편한 사실은 또 어떨까 궁금합니다.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헷갈리는 지점을 남깁니다. 많은 사람을 해치는 것은 정말 나쁜 것이고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그럼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소수의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케케묵은 공리주의의 딜레마를 넘어서 저는 모든 것의 근원에 있는 진리는 하나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강조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고 알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분명히 표현하자면 이 하나의 진리에 가까이 도달한 것, ‘나쁜 것’이라고 알게 되는 것은 진리로부터 ‘상대적으로’ 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S 루이스가 탐구하는 ‘순전한’ 기독교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온 인류가 공유하는 참된 하나의 진리를 역추적하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제 지식과 사고의 한계로 인해 루이스의 논리전개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약간의 부끄러움이 남기는 하지만, 부족한 제가 한없이 배워나간다는 점에서는 너무 즐거운 여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진리의 측면에서 ‘좋은 것’으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를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1-1. 인간 본성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