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u | 나무 개발자 블로그입니다


고통과 고난에 대한 고찰 by namu

post image
image by fancycrave1

Not all pains are tribulation


들어가며

모든 고통이 고난은 아니다.

고통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위로 상승하는 것이다.


Pain, Suffering, Tribulation

pain: a bad feeling in a part of your body when you are sick or hurt

아프거나 다쳤을 때 경험하는 육체적, 물리적 고통.

suffering: a feeling of pain or sadness and worry

pain 을 경험하는 상태. 나아가서 슬픈 감정상태이거나 걱정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tribulation: a problem or difficulty

일반적으로 종교적 고난, 수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tri-, -bul- 로써 세 개의 못으로 된 날카로운 물체를 생각할 수 있다.


고통 - 양극화, 불평등

많은 사람들이 빈부와 생활수준의 양극화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자본의 거대한 사상이 세계를 잠식하며 불평등이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에 만연해감에 따라 이러한 양극화가 실현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감히 고난(tribulation) 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그저 날마다 심해지는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을 체감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 - 질병

코로나와 같은 질병도 다른 형태의 고통이다. 질병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 어떤 존재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 질병은 그것을 앓다가 죽어버린 해골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영원한 적으로 등장한다.

왜 우리는 좀비에 열광하는가? 수없이 몰려드는 좀비떼, 물리치고 물리쳐도 어김없이 에워싸는 시체의 무리는 세계에 만연한 질병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의 목적이 고통이며, 만나자마자 무조건 싸워야만 하는 대상이다.

질병은 우리 모두가 가장 빠르고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고통 그 자체이다.


시대의 죄악

양극화와 불평등, 질병을 우리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들 ‘때문에’ 모든 사람의 슬픔과 걱정이 시작되었는가?

절대 아니다. 물론 그것들로 인해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 자체에는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것들은 원인에 따른 결과이며, 시대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현상이다.

원죄는 바로 인간에게 있다. 우리가 만든 체제, 우리가 만든 사회, 우리가 만든 무기, 우리가 만든 약, 우리가 만든 관계가 이 모든 것들을 출현시켰다.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과 슬픔, 걱정거리의 근본 원인은 우리 자신들로부터 나왔다.


하강하는 인간

이 시대에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은 아래로 끝없이 하강한다. 하강하는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거나, 체념하거나 혹은 극복한다.

1. 고통에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보통의 사람이라면 고통 앞에서 발버둥친다. 다쳤을 때 웅크리고, 아플때 약을 챙겨 먹는것은 당연한 생리이다. 발버둥치는 사람 중에 고통에 더 깊이 잠식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고통으로부터 상당히 해방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볼때 고통에 잠식되는 사람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모두 고통에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그들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는지의 여부 말고는 하강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두 사람 모두 고통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고, 고통에 잠식되는 슬픔 혹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환희와 함께 그것에 매여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2. 고통에 체념하는 인간

이 사람은 마약중독자와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고통이 자신을 찾아와 잡아당기면 일절의 저항 없이 빨려들어간다. 삶에의 의지가 없고 바람따라 물이 흘러감에 따라 나뭇잎처럼 사그라진다.

고통에 체념하는 사람은 고통에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의 위로가 된다. 발버둥치는 사람은 체념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일종의 안도감과 우월감을 경험한다. 이것 또한 일종의 마약과 같아서 발버둥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들에 더 큰 동기를 부여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하강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같다.

3. 극복하는 인간

극복하는 인간은 고통의 굴레에서부터 탈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른 종류의 혈투를 벌인다. 그는 양극화와 불평등, 질병과 싸우지 않으며 차라리 자기 자신과 싸운다.

그는 항상 깨어있기 위해 기도하며 이 땅의 강력한 풍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아래로는 깊게 뿌리를 박고 위로는 하늘을 쳐다본다(나는 언제쯤 이런 인간이 될까).

또한 극복하는 인간은 절망하는 사람이다. 하강과 상승의 모순 속에서, 나아가 무한함과 유한함 간의 끝없는 간극 속에서 형용 불가능한 절망을 경험한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는 상승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의 적은 고통이 아니다. 그의 적은 자신의 원죄이며 자신이 이 거대한 원죄의 시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는 원죄의 결과 따위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는 인격이라 할 것도, 싸울만한 가치라 할 것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승하는 인간

이러한 인간은 고난의 길(The path of tribulation)을 스스로 찾아나선다.

이것은 고통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찾아와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이다. 고난의 길은 자발적인 길이며 약속의 신랑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신부의 길인 것이다.

이 길을 스스로 걷는 사람은 마침내 하강하는 인간에서 상승하는 인간으로 변한다. 누군가 보기에는 고통을 당하는 그 어떤 사람보다 고통스럽고, 슬픔에 잠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슬픔에 잠긴 것처럼 보이나,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이 사람은 누구보다도 높게 올라가고 있다.

이 사람은 아프거나 슬프지 않으며 일종의 디오니소스적 쾌락의 상태 속에 살아간다. 이 사람에게 삶이란 삼일밤낮 끝날 줄 모르는 축제와 같다.

이 사람이 유일하게 괴로운 경우는 낙타와 같이 지난했던, 그리고 사자와 같이 울부짖었던 자신의 옛 모습을 생각할 때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혹은 그러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머물고 있는 끔찍한 광경을 바라볼 때 뿐이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명랑한 상태로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죄인 괴수와 맞서 싸운다. 용맹한 용사인 그가 눈앞의 무서운 괴수를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응시하는 한 그에게 승리는 정해진 수순이며, 마침내 상승의 끝인 천국에 도달하는 것은 약속된 결과이다.

그가 간직한 강력한 힘의 원천은 날마다 깨어서 자신의 진정한 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상기하고, 고난의 길의 끝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여 미친듯이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한 줄기 빛이란 바로,


God's everlasting love


양극화, 불평등과 같이 우리의 삶을 가혹하게 하는 잔인한 고통.
모든 사람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질병의 고통.
우리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은 사실 고난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상승하는 고난의 길을 걷는 자에게 고통이란 아무런 형체도, 의미도 없는 허상이다.

나는 언젠가 기쁜 마음으로 이 고난의 길을 나설 것이며, 이 글을 보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더 내가 먼저 간 고난의 길에 참여하기를 바란다.